헬싱키 프로세스와 북핵 및 인권
헬싱키 프로세스와 북핵 및 인권
  • 정귀순 기자
  • 승인 2019.01.2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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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북한의 핵과 인권은 동북아지역 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핵심적 안보이슈로 간주되어 왔다. 이 두 이슈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딜레마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핵 선결을 위해 인권이슈를 유보해야 된다고 보는 관점과 북핵이슈와는 별개로 북한의 인권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상반된 시각이 존재해 왔으며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2018년 4월 27일, 극적으로 이루어진 남북 정상 간의 판문점 선언과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난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이 두 이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부재한 상태이다. 본고에서는 헬싱키 프로세스의 교훈을 통해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구조를 정착시키기 위해 북핵과 인권을 어떻게 연계할 수 있을지에 대해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헬싱키 프로세스의 배경, 헬싱키 프로세스는 1972년 동서 블록 간 다자간 협상을 통해 1975년 ‘헬싱키 최종협약’을 도출한 이후 1989년 동구권이 붕괴되고 냉전체제가 극복되었던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헬싱키 프로세스가 시작되었던 배경에는 1970년대 초반에 조성된 동서 간 데탕트가 중요한 결정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7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닉슨과 브레즈네프 정상회담을 통해 전략무기감축협상(SALT)이 이루어졌고 거의 같은 시기에 베를린에 관한 4자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서독과 소련 및 폴란드와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시기에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과 현재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핵심적인 안보이슈가 독일문제였다면 동북아에서 가장 핵심적인 안보이슈는 한반도문제이다. 요컨대 유럽에서 독일문제 해결의 단초가 마련되면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라는 범유럽 다자간 안보협력이 가능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문제 해결의 시작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서 출발하였다. 이 정책의 핵심적 요체는 ‘현 상황에 대한 인정(recognition of the status quo)’이었다. 동구권 국가들을 적대국이 아닌 대화와 협력의 상대로 인정한 것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야기된 국경선에 대한 인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남한과 미국이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북핵의 실체를 전제로 협상을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미국의 접근방식과 유사점이 있다. 현재 한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화프로세스가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는 바로 북핵과 인권이 어떻게 연계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헬싱키 프로세스와 안보와 인권의 연계,유럽안보협력회의 내에서 안보이슈와 인권의 연계는 유럽의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10개의 원칙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우선 이루어졌다. 즉 ‘국경선 불가침 원칙’과 ‘인권존중의 원칙’ 및 ‘민족자결의 원칙’이 동서 양진영의 핵심적 협상목표가 되면서 두 원칙 간에 연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동구권측은 다자간 준비협상과정(1972년 11월 22일-1973년 6월 8일)에서 ‘국경선 불가침 원칙’을 타협불가능한 원칙으로 고수하였고 서구측은 인권을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원칙으로 요구하였다. 동서독 통일을 염두에 둔 서독의 입장에서 ‘국경 불가침의 원칙’은 수용 가능하지 않은 원칙이었으나 입장을 선회하여 수용하였고, 소련은 국경이 국제법과 평화적 수단, 합의에 의해 변경 가능함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타협의 결과로 소련은 인권과 민족자결의 원칙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대 타협의 결과로 인권은 10개의 원칙 중 제 7원칙 ‘인권과 사상, 양심, 종교 혹은 신념을 포함하는 근본적 자유의 존중’과 회원국 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인도주의적 조항이 제3바스켓으로 헬싱키 최종협약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다.

 헬싱키 최종협약이 1975년 헬싱키 정상회의를 통해 체결됨으로써 헬싱키 프로세스는 시작되었다. 이 헬싱키 프로세스는 약 14년 후에 소위 ‘의도되지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를 야기하게 된다. 의도되지 않은 결과라 함은 헬싱키 최종협약 체결 당시 어느 누구도 이 협약이 가져올 효과에 대해 예상치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헬싱키 최종협약에 내포된 인권관련 규범은 동구권 반체제 인권단체에게 즉각 전파되었고 동구권 공산정부에 헬싱키 최종협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서방측 인권단체들은 동구권 국가들의 인권침해 사례를 모니터링하고 동구권 인권단체들과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헬싱키 인권 규범과 관련된 단체들이 동서 양 진영에서 우후죽순처럼 설립되면서 초국가적 헬싱키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헬싱키 최종협약이라는 국제규범은 이른바 ‘네트워크 공명(network resonance)’의 단초를 제공하였으며 인권이라는 규범적 가치는 초국가적 헬싱키 네트워크를 통해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초국가적 헬싱키 네트워크는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s)’를 야기하였다. 즉 동구권 개별국가 내의 인권단체들은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였고 이 결과 구축된 초국가적 네트워크는 역으로 동구권의 공산정권에 대해 헬싱키 최종협약을 준수하도록 강한 압박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이렇듯이 국제규범은 때때로 사회정치적 변화를 일으키는 동인이 될 수 있음을 헬싱키 프로세스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특정한 계기와 맞물릴 때 일어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공명이 확산되는 특정한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89년에 동구권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혁명은 비엔나 재검토회의(1986년 11월 4일-1989년 1월 19일)를 계기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엔나 회의에서 헬싱키 인권메커니즘은 더욱 강화된 형태로 채택되었고 소련은 1991년에 모스크바에서 인권회의를 개최하는 것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물론 당시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Gorbachev)의 ‘글라스노스트(glasnost)’,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이와 같은 소련의 전향적 입장 변화는 동구권 인권단체를 고무시켰고 공산정권에 대한 개혁요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소련 외상 셰바르드나제(Shevardnadze)가 인정하였듯이 1989년 비엔나 회의가 끝날 즈음에 이미 철의 장막은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비엔나 회의로 촉발된 ‘임계효과(threshold effects)’는 동구권 국가들의 연쇄적인 민주혁명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홍기준,경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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